Essay

나의 커리어는 '스마트폰'에서 시작했다

twfnm67 2022. 5. 22. 19:33

 IT 업계 종사자는 주니어/시니어 구분 없이 모두가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만큼 IT의 트렌드는 빠르게 바뀌고 새로운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바닥은 뭐든 '짬'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야는 절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니어로서 꽤나 평등하고 수평적인 환경에서 근무를 할 수 있다. 모두가 서로 배우고 공부해 나가면서 발전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러하듯, 경험이라는 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에 한편으로는 주니어로서 고충을 겪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좀 더 쉽게 예를 들자면, 투지(2G)폰과 스마트폰으로 비유를 할 수 있다. 당신이 15년 동안 고객에게 투지폰을 팔아 온 영업 담당자라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당신이 고객에게 팔고자 하는 휴대폰의 성능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특히 이 휴대폰이 기존의 휴대폰에 비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점을 어필함으로써 고객이 해당 제품을 살 수 있도록 설득시켜야만 한다. 당신은 그간 열심히 일하며 쌓아 온 영업 노하우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스마트폰이라는 게 등장해 버렸다. 이제 당신은 스마트폰을 팔아야 한다. 하지만 당신은 스마트폰을 써본 적도 없고, 투지폰이랑 무엇이 다른지 모른다. 그래서 결국 스마트폰을 구매해서 직접 사용해보기로 한다. 스마트폰의 전원을 처음 켜는 순간, 당신은 왠지 모르게 자신의 영업 커리어가 0에서 다시 시작된 기분이 든다. 그래도 아직 투지폰을 쓰는 사람이 있기에, 자신의 특별 노하우를 발휘할 기회가 여전히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몇 년이 더 흐르자 투지폰은 시장에서 완전히 없어질 낌새가 보이고, 결국 당신도 스마트폰 영업 담당자로 커리어를 전환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주위를 살펴 보니, 이제 고작 경력이 2-3년 밖에 안 된 젊은 영업 담당자들이 이미 스마트폰을 먼저 접해보고선, 자신보다 더 뛰어난 영업 스킬을 발휘하고 있다. 휴대폰만 20년 가까이 다루어 온 당신은 스스로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자부했지만, 이제 2-3년 된 후배들에게 스마트폰의 새로운 기능들을 물어보는 신세가 됐다.
이것이 내가 느낀 IT 업계의 분위기 중 하나이다. 아무리 특정 IT 기술에 오랫동안 발을 담근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트렌드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그 동안의 커리어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바꿔야 할 순간들이 생기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보다 훨씬 더 늦게 들어 온 후배가 자신보다 더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상당 수의 시니어 선배들에 따르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위와 같은 경험에 따른 고민을 꾸준히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경력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실력을 인정 받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보니, 실제로 어마어마한 경력을 가진 시니어 분들도 항상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대한다.
그렇다면 이 분야는 시니어에게 너무 가혹한 업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니어도 주니어 나름의 고충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역시 또 한번 휴대폰 시장에 비유를 해볼 수 있다. 이번에 당신은 생애 첫 취업을 하게 되었고, 신입 스마트폰 영업 담당자로 채용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스마트폰이 세상에 출시된 지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낯설어 하는 사람도 많지만, 당신은 꽤나 자신이 있었다. 당신은 학창시절 첫 휴대폰부터 스마트폰을 썼고 줄곧 스마트폰을 써왔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은 자신있게 고객을 마주했으나 꽤나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신의 고객은 스마트폰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더러 당신은 한 번도 써본 적도 없는 투지폰을 들고 와서 "이 폰이랑 그 폰이랑 뭐가 다르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투지팀 소속이었는데 알고보니 투지팀이라는 게, 투지 폰을 쓰고 있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스마트폰으로 바꾸게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팀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 당신은 급하게 사내 온라인 교육을 신청한다. 해당 교육 과정의 이름은 '스마트폰 영업 기술'이다. 강의를 듣기 시작하는데 강의 목차가 다음과 같다.
'1. 스마트폰이란? 2. 스마트폰의 장점 3. 스마트폰 사용 방법 4. 스마트폰 비용 및 할인 방법'
교육을 다 들었지만 이렇다 할 수확이 없다. 이 교육은 알고 보니 투지폰 영업을 해 온 사람에게 신기술인 스마트폰을 가르치는 교육이었던 것이다. 다른 교육을 아무리 찾아봐도 '투지폰'에 대한 교육이 없으니 당신은 너무 막막하다. 결국 인터넷에 투지폰을 검색해본다. 하루종일 인터넷을 뒤져 본 당신은 투지폰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대충 감을 잡았고, 언제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투지폰보다 당연히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고객과의 상담을 하면서, 스마트폰은 인터넷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는 내용으로 말하기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고객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을 한다. 그러면 '알'이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거라고 이해하면 되느냐는 것이다. 당신은 대체 '알'이 뭔지 모르겠는 한편 전문가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결국 민망함을 무릅쓰고 '알'이 뭐냐고 고객에게 되묻는다. 그랬더니 고객이 '별' 같은 거라고 한다. 하지만 당신은 '알'과 '별'이 어떻게 같은 것이며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대충 그런 거라고 대답하고 업무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집에 가서 다시 '알'과 '별'에 대해 검색해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검색을 해도 온통 알과 별의 사전적 의미나 달걀, 행성 같은 그림만 나온다. 결국엔 옆 팀의 10년차 선배에게 물어보고서야 '알'과 '별'이 투지폰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일종의 스마트폰에서의 '데이터'와 비슷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검색해봐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옆 팀 선배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내용인 것이다. 당신은 그게 너무 부럽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옆 팀 선배는 "이런 거 알아봤자 요즘 쓰는 사람도 없고 별로 의미도 없는데요 뭘" 하고 웃어 넘긴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게 경력의 힘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이상으로 내가 IT 업계에서 일하며 주니어 연차로서 자주 느끼는 고충을 스마트폰 신입 영업 담당자에 빗대어 적어 보았다. 나의 커리어는 마치 '스마트폰'에서 시작한 이 영업 담당자의 커리어와 비슷하다. 누군가는 나의 커리어를 보며, 현재의 트렌드로서 자리잡고 있는 기술로 첫 커리어를 시작한 점이 굉장히 큰 매력이고 자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도 그 말에 동감한다. 하지만 투지폰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투지폰을 쓰는 사람에게 스마트폰을 파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의 상황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현재를 잘 알고 미래를 열심히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과거를 살아온 사람들과 같이 일하거나 과거를 살고 있는 고객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왠지 모르는 허탈함과 막연함, 장벽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스마트폰도 언젠가는 지금의 투지폰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스마트폰을 겪어 보았다는 것이 또 엄청난 경험과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현재의 스마트폰 공부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리고 새롭게 시장을 장악하게 될 휴대폰이 출시된다면 그것도 놓치지 않고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나도 지금의 주니어로서의 고민이 사라질 즈음 시니어가 될 것이다. 아마 그러면 또 위에서 말한 시니어로서의 고민을 하고 있을 테지만, 결국 주니어든 시니어든 서로 배우고 가르쳐주면서 상생하는 것이 이 분야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