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 & 아네르스 포그 옌센)
2020년부터 약 2년 간 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는 우리 삶을 기존과는 전혀 다른 불안과 무질서에 몰아 넣었지만, 한편으로는 예기치 않은 큰 교훈을 주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직장에서 재택근무라는 새로운 방식을 부득이하게 채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생각보다 큰 문제 없이 운영되었기 때문이다(오히려 장점이 더 많았을지도?). 우리는 다시 코로나로부터 정상화되면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책에서 언급하는 수많은 '무대 뒤의 노동'에 대해서만큼은 사실상 이 기회에 100퍼센트 재택근무제로 전환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함께 일했던 동료들 중 특정 인물이 떠올랐다. 그(혹은 그녀)는 만날 때마다 업무에 말그대로 '치여'있는 상태였다. 본인 말에 따르면 너무 바빠서 번아웃이 오고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단다. 한때는 그렇게나 열심히 일하는 그 동료를 존경하기도 했고, 또 한때는 몸을 사리지 않고 일에 몰두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의아했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재택근무를 기반으로 어쩌다 한번씩 출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도대체 왜 그 사람만 유독 일이 많은 것일까? 왜 만날 때마다 얼마나 바쁜지, 그래서 얼마나 힘든지 얘기하는 걸까?
그리고 또다른 일화가 있다. 한때 내가 신입 1년차이던 시절에는 친한 선배로부터 장난삼아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루는 그 선배한테 "저 별로 안 바빠요. 괜찮아요"라고 말했다가, "에이~ 00님 아직 멀었구만. 직장인은 무조건 바쁘다고 해야지!" 라는 조언을 들은 것이다(물론 반 농담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선배가 했던 말이랑 위에서 내가 언급한 동료분이랑 오버랩이 되는 것은 기분 탓일까 아니면 정말 나만 모르는 어떤 암묵적 법칙(직장인은 바쁘다고 해야한다는 법칙)이 있는 것일까.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지만, 어쨌든 가짜 노동은 분명히 존재한다. 왜냐면 나도 가짜 노동을 해 보았으니까. 그리고 요즘도 내가 하는 일이 전부 진짜 노동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오후 3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던 전 직장에서 이직한 뒤로, 나는 아직 새 직장에서 출퇴근의 눈치게임에 적응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사한 지 한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당장 직장에서 무슨 할 일이 있겠냐만은 나는 굳이 굳이 10시 - 17시라도 근무 시간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결국 여기서 당장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내가 앉아있는 '시간'으로 나의 '근무태도'를 인정 받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같은 양의 일을 한다 치더라도, 15시에 출근해서 16시에 퇴근하는 신입사원보다 10시에 출근해서 17시에 퇴근하는 신입사원을 아마 모두가 더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나는 일단 생각한다).
나는 다양한 고객사를 대상으로 일종의 '컨설팅'과 비슷한 업무를 하면서 결국엔 내가 했던 일들이 상당 부분 가짜 노동이라는 것을 깨닫는 때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고객사에 가서 감놔라 배놔라 하여도, 무대 앞의 '진짜 노동'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고객사다. 그들이 내 말을 듣고 업무에 혁신적인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그러면 좋겠지만) 결국엔 그들은 '비용 때문에, 인력 때문에, 기존 시스템 때문에' 그들만의 방식대로 풀어나갈 수도 있다. 고객 미팅을 준비하기 위해 50시간을 들이건 5시간을 들이건 고객의 상황을 고객만큼 잘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다 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고객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준비하는 고객 미팅은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자기만족에 불과한 가짜 노동이다.
청소부는 더 많은 시간 동안 청소할수록 더 많은 구역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 택시 드라이버가 더 오래 근무할수록 더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있듯이. 이렇게 무대 '앞'에서 '진짜' 노동을 하는 근로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노동을 하는 꼭 필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가 하는 일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할까? 내가 하는 일이 없어진다고 해서 당장 고객사에 서비스 장애나 중단이 생기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는 진짜 노동자들이 줄어들고 가짜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더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고 점점 더 높은 교육 수준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교육의 내용이 현장에서 쓰이는 일은 드물다.
뜬금없지만 출산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책에서도 나와있듯이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치부되던 집안일과 육아는 무대 앞의 진짜 노동이지만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적이 결코 없다. 이러한 종류의 노동에는 임금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출산율이 줄어드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도 필연적인 현상이다. 사회적으로 출산율을 늘리는 것이 가짜 노동자 양산보다 더 시급한 일이라면,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 가치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더 큰 임금을 주어야 맞는 것일까? 돈으로 해결 보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노동을 더 존중해야 맞는 것일지에 대해 사회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는 분명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가짜 노동자 양산에 쓰이는 사회적 예산을 더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