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한테 주어진 과제를 퇴근 시간까지 다 끝내지 못하고 집에 오면 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면 자기 전까지 계속 생각하고 심지어는 꿈에서도 그 일에 관련된 꿈을 꾸었다. 하지만 다음날 출근할 때까지 그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떠올리거나 조금 더 진도가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퇴근 후 일상에서 자꾸만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고민을 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이 문제에 관해서, 나보다 직장 생활을 30년 정도 더 오래 해오신 대선배님께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아빠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일에 대한 생각이 자꾸 날 때가 있어?"
"당연하지. 엄청 많지."
"그럼 그 생각을 계속 하다보면 안 풀리던 문제가 풀릴 때가 많아?"
"거의 없지."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나눈 대화였지만 그 순간 나는 머리에 스위치를 달았다. '일'에 대한 스위치다. 이 스위치는 출근한 직후에 켜고, 퇴근하면서 바로 끄는 것이다. 집에 와서까지 스위치를 켜 놓는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스위치를 통해 회사와 집을 분리했고 일과 삶을 완전히 구분하면서 워라밸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그 당시의 나는 워라밸을 참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회사에 있을 때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도 일로써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딱히 일로써만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내 일상에서도 크고 작은 목표를 지켜 나가면서 다양한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 나의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직을 하게 되면서 환경이 변하다 보니, 나의 생각과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업무와 삶의 공간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던 전 직장과 달리, 새로운 직장에서는 full 재택근무를 하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져 버렸다. 게다가 회사에서 근태 관리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일과 삶에 대한 모든 컨트롤은 나의 책임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타인에게 필요한 일을 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 자신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서, 더이상 일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일을 하는 것이 곧 나의 성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 워라밸을 논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회사에서 강조하는 것이 워라밸이 아니라 워라하(워크 앤 라이프 하모니)인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일까 싶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퇴근이나 휴가를 통해 일에서 '해방'되는 즐거움을 느끼겠지만, 나에게 퇴근이나 휴가는 오늘의 공부를 내일로 미루는 수단처럼 느껴진다. 퇴근을 하거나 휴가를 쓴다고 해서 오늘 해야하는 일을 누가 대체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좀 더 일하면 일한 것에 대한 대가는 내 스스로의 보람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점에서 워라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지만, 타인을 위한 일을 할 때와 나를 위한 일을 할 때 워라밸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나의 '워크'가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면 나의 '라이프'를 보장 받음으로써 나의 행복을 챙겨야 한다. 그러나 나의 '워크'가 나를 위한 일이라면 '라이프'를 조금 희생해서라도 치열하게 '워크'를 해야 할 때가 있다. 혹은 '워크'가 '라이프'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직을 하면서 나의 스위치는 없어졌다. 하지만 내 삶이 더 불행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오너십을 가질 수 있는 일, 나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할 기회를 꾸준히 주는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나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인턴으로 지냈던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회사에서 나의 라이프를 희생 당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려 보면 역시 워라밸의 중요성은 어떤 '워크'를 하고 있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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