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시절에 '영화로 본 역사'라는 강의를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씬과 소재 그리고 인물들의 행동에 담긴 상징에 대해 역사적 배경과 연관된 설명을 들으면서 감상하는 강의였다. 짧은 영화 속에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영화와 역사를 따로 배울 때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이 책은 심리학, 특히 정신병리적 영역에 대해 그 강의에서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이다.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 진단 체계를 기준으로 대략 60편 정도의 영화 속 수많은 인물들을 분석한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DSM 진단 체계로 장애를 진단할 때,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정신병의 진단 기준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장애, 예를 들어 현대인이 흔히 앓는 우울장애를 진단한다고 할 때, '우울감이 심하고 무기력하다'라는 증상을 통해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리지 않는다. 특정한 행동 양상이 특정 개수 이상 특정 개월 간 지속되었을 경우 등의 매우 구체적인 진단 기준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해당 기준에 부합한다고 해도 예외사항이 또 존재한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정신)의 영역을 정량적인 기준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이 책에서는 정신 장애를 진단하는 요소인 '특정한 행동 양상', '특정 개수', '특정 기간' 중에서, '특정한 행동 양상'을 중심으로 영화 속 인물을 파헤친다. 심리학(정신병리)적 요소로 영화 속 인물을 분석할 때 영화에 대한 섬세한 비평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가장 처음에 소개되는 '영화 속 신경발달장애' 부분을 읽을 때였다. 한때 자폐나 정신지체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희한한 점은 대부분 정신지체=선(善)으로 포장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 주인공을 미화하기 위한 요소로써 장애를 사용하는 것은 정신병리에 대한 이해 없이 대중들에게 근거 없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 작가는 <말아톤>과 <굿닥터>에서의 주인공을 분석하며 현실적인 장애의 모습과 미화된 모습을 비교해 주었는데, 아무래도 <말아톤>이 실화를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이기에 더 현실적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장애 유형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화 속 해리성장애' 부분이었다. 실제로 본 적 없는 영화들이었음에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성 기억 상실 혹은 해리성 정체감 결여 등은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은 때때로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극히 드문 가능성으로 실제 발현되는 장애라고 생각하니 섬뜩했다. 특히 다중 인격이라는 것이 단순히 상황에 따라 셩격이 변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름, 나이, 성별, 직업' 등이 모두 다른 인격적 존재가 한 사람 안에 여럿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영화 속 인격장애' 중 '강박성'을 다룬 부분에서는 무언가 공감되는 내용이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특정 부분에서 강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변을 한치의 오차 없이 정돈해야 하는 영화 인물이 소개되었을 때 가장 공감이 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내 사물함 속에 있는 물건은 내가 정한 기준에 따라야만 했기 때문에, 하교길에 뭔가 잘못된 것이 하나라도 생각나면 다시 돌아가서 확인을 해봐야만 직성이 풀렸고, 정리하고 와야만 했다. 책상에 있는 책들은 무조건 크기 순서대로 쌓여 있어야 하고, 한 권이라도 비뚤어져 있으면 다시 각을 잡았다. 또 한때는 스스로 결벽증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지금에서야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둔감해졌지만 또다른 어떤 부분에서의 강박을 가지고 있고 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강박을 앓고 있을 것 같다.
영화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가끔은 현실보다 과장되게, 혹은 극단적으로 캐릭터를 설정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그런 요소들을 정신병리와 연관지어서 비평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지 못한 흥미 요소가 많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영화를 두 가지 이상의 정신병리적 요소와 결부시켜 해석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영화 <트루먼 쇼>를, 타인의 사생활을 대상화하고 훔쳐보는 '관음증'으로도, 자신의 사생활이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증'으로도 해석한 것이 그런 점이다.
또한 정신병리학 전문가의 입장에서 영화를 들여다볼 때 어떤 우려를 하게 되는지, 그 생각을 읽어볼 수 있는 점도 좋았다. '영화 속 성적장애와 변태성욕', '영화 속 인격장애' 등에서 작가가 캐릭터를 분석하며 우려하였던 바와 같이, 사회적으로 절대 용인되어서는 안되는 행위들이 영화 속에서는 아름답게 포장될 때가 있다. 즉, 사실상 '장애', '질병'으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들이 '사랑'으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책 한 권만으로 수많은 영화를 감상하고, 거기에 더하여 정신병리에 대한 얕은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읽는 내내 흥미롭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 단순히 캐릭터에 대한 정신병리적 분석만 기술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영화에 대해 짤막한 줄거리 소개가 함께 기술되어 있어서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되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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