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아주 특별한 경로를 통해 내 손에 들어온 책이다. 내가 직접 사긴 했지만 난생 처음으로 블라인드 서적을 구매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사던 날은 남자친구랑 합정 거리를 걸어가다가 신기하게 생긴 책방을 발견해서 그 길로 들어가 구경한 날이다. 다른 책들을 쭉 둘러 보아도 딱히 당기는 책이 없었는데 한쪽 구석에 서류 봉투 색깔의 포장지에 쌓인 책들이 일렬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책 제목이나 표지는 볼 수 없으나, 각 포장지 겉면에 책에 대한 일종의 '힌트'가 적혀 있었다. 여러 권의 책 중에서도 이 책에는 '가족 중의 누군가가 아플 때 보면 좋은 책'이라고 쓰여 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골랐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이 책을 구매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4-5개월 혹은 반년 정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대에 부풀어 포장지를 뜯어보았을 때 사실 처음에는 실망스러웠다. 내가 기대했던 책의 겉모습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구입해도 내용물이 기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블라인드 책의 장점이자 단점인가보다고 생각했다. 겉모습만으로 책을 판단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사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문제를 다룰 책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플 때 보면 좋은 책이라길래 희망적인 책일 줄만 알았던 것이다.
책꽂이에 꽂아놓고 그렇게 미루고 미루어 오다가 최근에야 펼쳐 보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장을 넘기게 된 책이었는데 내용은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두려움을 갖고 읽기 시작했던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섭고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며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목숨을 억지로 연장하는 것이 어쩌면 환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고통의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의미에 대한 메시지보다는 다른 부분이 더 인상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식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일화였다. 어머니의 병을 대하는 두 형제의 의견 차이와 그 속에서도 자식을 위해 최선의 판단을 해나가는 어머니의 이야기. 아픈 상황에서도 자식들의 속을 말그대로 '훤히 들여다 보고 있는'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현실 속에서 분명히 매우 흔하게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나도 5년 전부터 엄마가 크게 아팠지만, 자식으로서는 아픈 어머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나의 어떤 행동이 진정으로 엄마를 위한 일인지에 대해서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픈 당사자인 엄마는 언제나 엄마로서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다. 나의 이야기는 책에 나오는 일화와는 결이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이 있었던 이야기였다.
또 하나의 인상깊은 지점은 책의 주인공인 의사 미토 린코가 의사의 본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지점이었다. 자고로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환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의사로서의 가장 중요한 역량인 것 같다. 환자가 치료를 원하지 않을 때에는 억지로 치료를 받게끔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왜 치료를 원치 않는 것인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진짜 환자를 위한 방법'을 권할 줄 아는 의사가 정말 훌륭한 의사라는 것이다.
또한 미토 린코를 보며 나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재택 치료를 다니며 알게 되는 다양한 환자에게 공감하는 미토 린코를 보며, 나는 과연 엄마에게 얼만큼 공감하고 있는지, 엄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또 한가지는 직업에 대한 생각이다.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과연 내가 가진 직업에서 요구되는 직업정신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내 본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등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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